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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읽는/세종에게

도롱태는 신라를 지나가고


알려 드릴 사실은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아이젠하워가 했던 그 발언 go to korea는 당시 유행어처럼 관용어가 되어서 다음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고 전해집니다.


Go to Korea, '난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다'


JTBC 뉴스룸의 앵커 브리핑, 이게 가끔 나를 놀래킨다. 저 날도 뉴스를 들으며 글을 읽고 있었다. 내가 요즘 다루는 글은 『증도가남명계송』이다. 세종이 두 아들과 함께 '국어로 번역'했다는 책이다. 그들이 새긴 우리말투, 볼 때마다 새롭다.

회두(迴頭)ㅣ면 요자(鷂子)ㅣ 과신라(過新羅)하리라


머리 두르혀면 도롱태, 신라를 지나리라


『증도가남명계송』의 구절이다. 도롱태는 '쇠황조롱이', 또는 '새매'를 가리키는 옛말이다. '두르혀다'는 '돌이키다'의 옛말이다. '머리를 돌이키면 도롱태가, 신라를 지나리라', 당나라의 영가현각이 지은 노래를 송나라의 남명법천이 이어 불렀다. 그리고 세종과 두 아들이 저렇게 우리말로 새겼다. '과신라(過新羅)', 이 말도 제법 유명한 말이다. 당나라 선사들이 즐겨 쓰던 구절이다. 아이젠하워가 했던 그 발언 'go to korea'만큼이나 유행어, 관용어로 쓰이던 말이다. 『벽암록(碧巖錄)』이란 책이 있다. 송나라 때 엮은 선불교, 선사들의 어록이다. 워낙 유명한 책, 서양의 여러 말로도 번역하여 널리 알려진 책이다. 이 책에는 '전과신라(箭過新羅)'라는 구절이 실려 있다. '화살이 신라를 지나리라', 이걸 영어로는 'The arrow passed to Korea'라고 새긴다. 이 또한 조금이라도 선불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 알만한 구절이다.

Go to Korea

Passed to Korea


아이젠하워의 저 말은 처음 들었다. '머리 두르혀면 도롱태, 신라를 지나리라', 나는 이 말을 돌이키면 늘 궁금하다. 늘 세종과 두 아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저 말을 읽으며, 새기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었을까? 당나라의 스님들이 입버릇처럼 쓰던 말이다. 신라 사람들, 고려와 조선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묘한 뜻이 빨라, 눈깜짝할 사이에 곧 지날시니......

하다가 빛을 돌이켜 살펴 헤아리며 짐작하면, 벌써 어기어 지나릴새


머리 돌이켜 매도롱태 신라를 지나리라 하시니라


'신라를 지나리라', 'Passed to Korea', 언해불전은 이 말을 저렇게 풀이한다. 요즘의 속된 말로, '잔머리 굴리는 사이에, 매도롱태는 벌써 신라를 지나갔다'는 말이다. '살펴 헤아리고, 짐작하고' 그러면 '벌써 어기어' 지나 간다. 당나라 사람들에게 신라는 아주 먼 땅이다. 요즘 사람이라면 달나라나 별나라를 가리켰을 것이다. 조선의 사람들도 '빛의 속도'를 이야기한다. '빛을 돌이켜'의 '빠름'에 비긴다. 깜빡하면 지나간다. 트럼프 대통령은 '게임'이란 말을 썼다. 그만이 아니다.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 게임을 하려 든다. 남북의 사람들도 게임을 하려 든다. 배팅을 하고 이기려 든다. 'Korea'를 두고 잔머리를 굴린다. 당나라 때부터 저런 말을 썼다.

당나라 사람들에게 신라라는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그냥 아주 멀고 먼 나라였을까? 신라 사람들에게 당나라는 무슨 뜻이었을까? 그냥 먼나라였을까? 조선의 세종에게 신라는 무슨 말, 무슨 뜻이었을까? 내가 진짜로 궁금한 게 이거다. 세종의 세계, 세종의 나라, 세종에게도 저기 먼 변방의 조그만 나라였을까?

불법(佛法)이 천하에 두루 퍼졌고, 우리나라는 여뀌 잎처럼 작은데, 이 같은 불법을 깡그리 배척할 수는 없다.


세종실록, 세종의 말씀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나오는 말, 여뀌 잎은 손가락처럼 작고 가늘다. 고구려나 발해, 대륙을 누비던 시절도 있었다지만, 고려와 조선, 어느 새인가 우리 조상들의 생각도 저렇게 바뀌었다. 여뀌 잎처럼 작은 나라, 세종의 신라도 그렇게 멀고 작은 나라였다.

'머리 돌리는 사이에 도롱태는 신라를 지나간다', 이 말은 믿얼굴, 본질을 바로 보라는 말이다. 헤아리고 따지고, 잔머리 굴리다간 신라는 물론이고 달나라도 별나라도 빛의 빠름만큼이나 휑하니 어그러지고 지나가 버린다는 조언이다. 게임이란 말이 딱 그렇다.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지겠지. 그렇게 또 훌쩍 지나가겠지.

첫 구는 얼굴 없는 부처요, 둘쨋 구는 얼굴 있는 부처니, 배울 사람이 얼굴 밖의 성(性) 구할까 저어할새 그리 이르시니라.


앵커 브리핑을 보던 그 때, 나는 저 구절을 새기고 있었다. 얼굴 있는 부처와 얼굴 없는 부처, 부처의 낯을 따지는 말이 아니다. 부처의 얼굴은 부처의 믿얼굴, 부처의 본질이다. 얼굴대가리, 또는 얼굴그르메의 차이를 묻는다. 학인(學人), 또는 학자(學者)를 '배울 사람', 또는 '배울 이'라고 새긴다. 이 것도 언해불전의 우리말투이다. 헤아리고 짐작하는 일은 뭘까? 그러다가 망한다는 말은 뭘까? 그렇다면 믿얼굴을 '바로 보는 일'은 또 뭘까? 그래서 앵커의 말씀, 깜짝 놀랐다.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그 일의 본질은 뭘까? 아이젠하워가 한국으로 가야 하는 까닭은 뭘까? 트럼프 대통령이나 김정은 위원장에게 닥친 게임의 본질은 또 뭘까? 깜빡 하면 빛의 속도로 지나간다.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잔머리를 굴린다면, 한국에 와 본들 다 지나가 버린다.

트럼프의 게임이야, 내가 알 바가 아니다. 신라는 어쨌든 먼 나라이다. 작은 나라이다. 그런 나라, 그의 게임도, 아이젠하워의 난제도 빛의 속도로 지나간다. 이 땅에 사는 우리의 얼굴, 평화이다. 이런 건 헤아리고 따질 것도 없다. 이게 이 일의 믿얼굴이다. 이런 일에 이김도 짐도 없다. 우리마저 잔머리를 굴리다간 다 지나간다. 도롱태가 신라를, 우리의 이 땅을 훌쩍 지나간다. 앵커의 브리핑, 아! 저 사람, 우리의 믿얼굴을 묻는구나. 세종이라면 어땠을까? 그에게 신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그에게 우리의 믿얼굴은 뭐였을까?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 게임도 훌쩍 지나가겠지. 이기고 지고, 누군가는 또 누구 탓을 하겠지. 작고 힘없는 나라, 탓을 짊어 지겠지.

나라의 말씀이 중국과 달라, 서로 사맛디 아니할 새,

얼굴 있는 부처와 얼굴 없는 부처,


훈민정음과 언해불전의 말투에 담긴 세종의 뜻도, 도롱태처럼 훌쩍 신라를 지나가 버렸다. 낯선 말, 낯선 뜻이 되고 말았다. 누구를 탓할까?

증도가, 그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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