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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말의 얼굴

1.13 뉘라서 카냥하리


오늘은 내가 쏜다

     겁나 멋져부러……

 

오늘도 이런 말을 들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즐겁다. 말도 좋고 기분도 좋다. 이런 게 진짜 이바지이다. 쏘는 이는 멋지다. 당당하다. 저프고 싁싁하다. 쏘는 이도 알고, 멋져부러, 칭찬하는 이들도 다 안다. 먹이고 먹고, 함께 만족, 배가 부르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모두의 살혬이 열린다. 그런데 오늘이야 내가 쏜다지만, 내일은 누가 쏘나? 그 내일은? 그야 또 누군가 쏘겠지. 여기서도 비는 이와 이받는 이가 마주선다.

쏘는 이가 씩씩한 까닭은 받아 먹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쏘는 밥, 이받는 음식, 누군가 고맙게 받아 먹기 때문이다. 받아 먹는 이들이 없다면, 또는 고맙게 받아 먹지 않는다면 어떨까? 당연 멋지지 않다. 저프지도 싁싁하지도 않다. 멋지고 씩씩하고, 이런 느낌은 상대로부터 온다. 마주선 이들로부터 온다. 쏘는 이의 멋짐은, 받는 이가 멋지면 멋질수록 커진다.

여래(如來) 맛처음 성도(成道)하심을 보삽고


위의를 싁싁이 하며 가자기 하여, 재법(齋法)을 공경하더니

재법(齋法)은 가작하며 싁싁하며, 무거워 차례로 다녀 비롬을 이르니라

 

‘가작하다’, 또는 ‘가자기’는 가지런하다의 옛말이다. 엄정(嚴整)을 ‘싁싁이와 가작이’로 새겼다. 재법(齋法)은 밥을 빌어 먹는 법이다. 부처가 제안하고 대중이 받아들인 법, 맛처음-최초의 법이다. 일곱집을 차례로 다니며 빌어 먹는,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법으로 정했다. 먼저 가지런히 차리라고 한다. 싁싁하고 무겁게 다니라고 한다역설(逆說)이란 말이 있다. 뒤집는 말이다. 거스르는 말이다. 밥을 비는 이와 밥을 이받는 이, 씩씩하고 멋진 쪽은 아무래도 밥을 쏘는 이이다. 얻어 먹는 이, 게다가 빌어먹는 쪽이 멋질리 없다. 그게 상식이다. 멋지고 싶다면 이받는 쪽, 쏘는 쪽에 서야 한다. 그런데 부처는 반대의 길을 갔다. 빌어먹는 쪽으로 가라고 했다. 그것도 당당하고 멋진 몸과 마음으로 빌어먹으라고 했다. 부처는 이렇게 빌어먹는 일을 ‘평등으로 화()하다’라고 표현했다.

평등한 자()는 내 몸의 평등한 마음으로 화()하여 저로 (하여금) 평등한 마음으로 주게 하니, 밥에 평등한 이는 법에도 평등할새 능히 무량한 공덕을 이룰 곳이다.


보리(菩提)는 중생과 부텨왜 가지로 본래 뒷논거시라

 

보리(菩提)는 인도말이다. 한문으로는 각(覺)이라고 새긴다. 언해불전은 이 말을 '알다', 또는 '아롬'이라고 새긴다. 평등(平等)은 '가지'라고 새긴다. '한가지'의 옛말이다. 본래 뒷논 것, 본래 가진 것이라고 한다. 중생과 부처가 본래 평등한 까닭이다. ()는 바꾸다, 또는 바뀌다라는 뜻이다. 본래 평등한 것이 평등하지 않은 것으로 바뀌었다. 이걸 다시 평등으로 바꾸는 일이다. 빌어먹는 이가 이받는 이를 평등하게 바꾼다. 평등하게 만든다. 빌어먹는 이가 평등하면 이받는 이가 평등해진다. 빌어먹는 이가 싁싁한 까닭은 그의 몸과 마음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싁싁한 이를 이받는다면, 이받는 이도 싁싁해진다. 빌어먹고 이받고, 서로가 서로를 평등하게 만든다. 싁싁하게 바꾼다. 이게 역설이라면 밥의 역설이다. 평등을 실천하는 역설이다. 평등의 자(), 평등의 사랑, 평등하지 않은 현실을 평등하게 바꾸어 가는 첫걸음이다

공생은 가난한 이를 버리고,

음광은 가면 이를 버리니

 

하나는 가면 이는 쉽게 보시하리라 여기고

하나는 가난한 이에게 인()을 심어주기 위해서라 여기니

여래가 (둘다) 외다 하셨다.

 

공생과 음광은 부처의 제자 중에서도 손꼽히는 제자의 이름이다. 둘 다 밥을 빌어 먹는 법에 따라 밥을 빌어 먹었다. 빌어 먹을 집을 가리거나 고르지 말라고 했다. 닿는 대로 일곱집을 차례로 다니라고 했다그런데 똑똑한 공생, 나름 따져 보았다. 가난한 이, 제 입 하나도 많다는 이들에게 빌어 먹는 게 옳은 일일까? 가면 이야 어질고 넉넉하다. 밥을 좀 이받은들 어려울 게 없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이를 버리고 가면 이의 집을 골랐다. 똑똑한 음광도 나름 따져 보았다. 빌어먹는 까닭이 뭔가? 이받는 이에게 이받는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결과를 얻는다. 비는 이를 이받는다면 좋은 원인을 심는 것이다. 가면 이야 이미 넉넉하다. 그래서 그는 가면 이를 버리고 가난한 이를 골랐다.

법이 있다면 해석이 있다. 공생과 음광은 법을 나름대로 해석했다. 그리고 반대의 길을 갔다. 가리지 말라는데 갈랐다. 고르지 말라는 데 골랐다. 제 해석에 따라 법을 바꾸었다. ‘외다’는 그르다의 옛말이다. 서로 다른 해석과 선택, 부처는 둘다 ‘외다’고 했다.

뉘 능히 밖을 향해 정진(精進)카냥하리오

취하고 버릴 마음내면, 사람을 더럽히리

도원(桃源)의 골짜기, 꽃피는 곳은

동녘바람 기다리지 않아도, 제 봄이 있나니


해드롬을 쇽졀없이 잘카냥하야

 

()란 글자를 카냥이라고 새겼다. 정진,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실천하는 사람, 저도 알고 남도 안다. ()은 말이 많고 큰 모습을 가리킨다. 과시, 자기를 드러내고 자랑하는 일이다. 정진하는 사람이 밖을 향해 자기를 드러낸다. 그런 것이 ‘정진카냥’이다. 잘카냥이란 말도 있다. 이 말은 좀 더 강하다. 대놓고 잘난체 떠든다. 이에 비해 카냥은 좀 젊잖다. 은근하고 교묘하다.

취하고 버리는 일, 카냥이라고 부른다. 정진하는 이들이 대개 그렇다. 가리고 고른다. 취하고 버린다. 저 노래는 그런 일, 그런 이들을 탓하는 노래이다. 사람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한다. 내가 내 마음대로 가리고 고른다면, 누군가는 가려지고 골라진다. 그게 카냥이고 그게 더럽히는 일이 된다. 똑똑한 공생과 음광이 그랬다. 함께 정한 평등의 법, 제 나름 가리고 골랐다. 취하고 버렸다. 말하자면 이 것은 ‘평등카냥’이다. 공생과 음광이 카냥하는 까닭은 그들이 나름 똑똑하고 정진했기 때문이다.   

수행할 사람이 남의 시비를 보고 제 이르기를, ‘나는 유능하고, 나는 안다’고 하여 마음에 말학(末學)므던히 여기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이것은 청정한 마음이 아니다. 제 성품에 늘 지혜를 내어 평등한 자()를 행하여, 마음을 낮추고 모든 중생을 공경하는 것이 수행할 사람의 청정한 마음이다.

 

부처는 외진 곳을 찾아 나무 아래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들었다. 그런 자리가 절이 되었고, 그런 사람들이 승단이 되었다. 이걸 종교니 교단이니 이름을 달지만, 그들의 모둠은 그냥 학교에 가깝다. 어느 사회, 어느 시절이나 학교나 교육은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어쩌면 가장 차별된 자리일 수 있다. 힘이 있고 돈이 있고, 어진이들만이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다. 차별이 심한 계급사회일수록 교육의 기회는 좁고 적다. 부처의 교육, 부처의 학교는 말하자면 대안교육, 대안학교였다. 처음 모인 사람들, 대개는 기회를 가진 어진이들이었다. 대개는 넉넉했다. 상류 사회의 교육을 받을만큼 받았다. 유능하고 똑똑했다. 빌어먹는 쪽 보다는 이받는 쪽에 어울리는 이들이었다. 평등의 길이라도 이받는 쪽에서 평등을 실천할 수도 있었다. 그게 훨씬 쉽고 빠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처와 대중은 빌어먹는 쪽을 선택했다. 그걸 법으로 정했다.

한번 정한 법, 아예 해석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들, 게다가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들, 넉넉한 사람들, 어진이들이다. 요즘에는 엘리트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이들, 으레 가리고 고른다. 그러면 카냥이다. 잘난 사람들의 카냥, 특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약점이 되는 수도 있다. 무엇보다 위험할 수도 있다. 말학(末學), 공부 못하는 이들, 공부할 기회라곤 가져 본 적도 없는 이들, 어리고 사오나운 이들이다. 어진이의 카냥은 어리고 사오나운 이들의 살혬을 홀라당 뒤집어 엎을 수도 있다. 카냥의 바탕에는 무던함이 있다. ‘므던하다’, 가볍다는 말이다. 어리고 사오나운 사람들을 가벼이 대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더럽힌다. 카냥하는 마음은 평등을 저버린다. 평등은 나와 남을 아우르는 말이다. 나와 남이 본래 한가지란 뜻이다. 그래서 어질수록 스스로를 낮추고 남을 공경해야 한다. 그게 남을 더럽히지 않는 길이다. 그리고 그게 저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