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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말의 얼굴

1.2 내 얼굴대가리는 겁나 커


이같이 사뭇 알지 못한다면, 얼굴대가리에 거리끼리라


언해불전의 한 구절이다. 얼굴대가리, 사전에도 없는 말, 이런 말을 만나면, 문득 인터넷을 찾아본다. 이른바 SNS, 물이 좋다. 뜬금없는 말에 뜬금없는 상상, 뜬금 없는 놀이가 된다. 뜬금없는 짓에도 재미가 있다. 기분도 좋아진다.

내 얼굴대가리는 겁나 커……


대가리, ‘사람의 머리를 속되게 이르는 말’, 국어사전은 이렇게 풀이한다. 겁나 큰 저이의 얼굴대가리에는 뭐가 들었을까? 15 세기의 말과 21 세기의 말, 목판으로 찍은 글과 액정으로 나톤 글, 오륙백 년이 흘렀다. 얼굴대가리, 말은 같아도 뜻은 다르다. 이게 참 재미있다. 인터넷은 지금 그대로가 타임머신이다. 앉아서 천년, 서서 만리, 심심할 겨를이 없다.

겁나 큰 얼굴대가리야 뻔하다. 하지만 15 세기의 얼굴대가리는 좀 다르다. 형각(形殼)을 얼굴대가리, 또는 얼굸대가리라고 새겼다. 얼굴과 대가리라는 대구로 읽을 수도 있고, 얼굴의 대가리라고 읽을 수도 있다. 형각, 이런 말은 굳이 한자가 아니더라도 까다롭다. 언뜻 들어서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 차리기 어렵다. 예를 들어보자. 손가락으로 땅콩을 으깨면 두 개의 콩알이 나온다. 으깨지는 껍데기가 대가리이다. 안에 들어 있는 콩알이 바로 얼굴이다. 땅콩을 힘 주어 으깨는 까닭은 콩알이 먹고 싶기 때문이다. 대가리가 얼굴을 감싸고 있다. 으레 콩알은 먹고 대가리는 버린다. 우리에게 땅콩이 땅콩인 까닭, 콩알이 땅콩의 얼굴이다.

질(質)은 꾸밈없는 믿얼굴이라


요즘에는 본질(本質)이란 말을 쓴다. 땅콩의 본질, 15 세기사람들은 믿얼굴이라고 불렀다. 땅콩의 본질과 땅콩의얼굴, 말이 다르면 느낌도 다르다. 아무튼 땅콩의 얼굴에는 살이있고 맛이 있다. 심심풀이 땅콩이라지만, 몇 알만 먹어도 잠깐의 허기를 메울 수도 있다. 이런 일에 설명이 따로 필요 없다. 조그만 아이들도 뻔히 다 안다. 그런데 껍데기를 으깨더라도 콩알이 나오지 않는다면 어떨까? 이게 참 허탈하다. 대가리 안에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이게 빈대가리다. 요새는 쭉정이라고 부른다. 빈대가리건 쭉정이건 얼굴이 없다면 맥이 빠진다. 15 세기에도 21 세기에도 이건 똑같다. 요새도 빈 깡통이나 속빈 강정이란 말도 즐겨 쓴다. 이런 게 대가리와 얼굴을 마주 세우는까닭이다. 대가리 속의 얼굴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지난 겨울, 우리는 얼굴에 집착하는 대통령을 보았다. 무슨 주사, 무슨 실, 얼굴을 예쁘게 만들어 주는 갖가지 기술과 도구에 대해 들었다. 21세기 대통령의 얼굴, 15세기에는 ‘낯’이라고 부른다. 15세기의 말투에서 낯과 얼굴은 아주 다른 말이다. 대통령의 낯은 대가리이다. 껍데기이다. 대통령의 얼굴은 대가리 안에 담긴 대통령의 본질, 알맹이를 가리킨다. 낯에, 대가리에 집착하는 대통령, 이게 의아하고 허탈한 것은, 그 낯에 그 대가리에 담긴 얼굴이 정말로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같이 사뭇 알지 못한다면, 얼굴대가리에 거리끼리라


‘사뭇 알다’ 대가리만큼, 얼굴도 잘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대가리에 거리끼게 된다. 어린 아이도 땅콩 대가리에 거리끼지는 않는다. 하지만 제 대가리에 뭐가 들었을까? 제 대가리의 본질은 뭘까? 이런 물음은 고약하다. 사람의 본질, 헌법의 본질, 대통령의 본질…… 어디 대통령뿐일까?

어쨌거나 내 대가리엔 뭐가 들었지? 대가리를 으깨보기 전에야 누가 알까? 대가리와 얼굴을 나란히 말하는 까닭은 무엇보다 제 대가리 안의 제 얼굴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민대가리란 말도 있지만, 거기에도 대가리는 있다. 물건에는 대가리가 있고 얼굴이 있다. 땅콩도 그렇지만 내 몸도 그렇다. 머리통이나 골통, 사람의 대가리도 뻔하다. 제 대가리를 굳이 으깨 보지 않아도 제 얼굴을 알 수 있는 자는 자기 밖에 없다. 제 대가리와 제 얼굴을 돌이켜 보는 일, 반성이다. 얼굴대가리라는 말은, 자기, 제 몸을 돌이켜 보기 위한 그릇이다. 수단이고 장치이다. 나를 나이게 해 주는 나의 믿얼굴, 나의 본질, 15세기 얼굴대가리는 이런 걸 상상하고 반성할 때 쓰던 말이었다. 반성하지 않는다면 사무치게 알 수 없다. 알지 못한다면 거리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