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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 평등과 자유의 열쇠/수정

dalga

上達可書 

 異端日盛。吾道日衰。驅民於禽獸之域。陷民於塗炭之中。四海滔滔。未有紀極。嗚乎痛哉。伊誰正之。必也學術之正。德位之達。爲人所信服者。然後可以正之矣。且下民昏愚。不知取舍。苟有一時之達者。闢之則去之。倡之則和之。此盖但知達者之爲所信服。而不知道之有邪正也。昔孟子雖窮而在下。卒能闢楊墨尊孔氏而天下從之。盖以德達。而其德足以信服乎天下也。蕭衍雖昏而無知。卒能興佛敎易風俗。而天下從之。盖以位達。而其位足以信服乎天下也。孔子曰。君子之德風。小人之德草。草上之風必偃。其是之謂歟。自是以來。上無賢君。下無眞儒。世敎陵夷。邪說橫流。達而在上者。又從而倡之。嗚呼。其弊有不可勝言者矣。及宋之盛。眞儒迭興。挾遺經繼絶統。扶斯道闢異端。而學者靡然從之。斯亦以德達。而爲人所信服故也。惜乎。有德無位。不能大行於世。永絶邪說之根本也。然而中國學士。尙賴其說。莫不以扶斯道闢異端爲己任。雖其弊之深也。不能遽絶。尙可望夫斯道之復振也。若東方則其弊尤甚。人皆好之篤而奉之謹。又號爲大儒者。反爲讚誦謌詠。助揚聲勢。鼓舞振動。彼下民之昏愚。惟從達者之好者。爲如何也。於是。先王之學。寂寥無聞。耳目所接。無非異端。襁褓孩兒。學語之始。卽誦其言。嬉戲之時。便設其儀。習與性成。恬不知非。邪與心熟。堅不可破。雖聦明之士。眩感其空玄。暴悖之人。喜懼其禍福。莫不尊奉歸依。毁倫滅理。風俗頹敗。傾家破産。父子離散。其禽獸之歸。塗炭之苦。亦不可旣矣。幸玆秉彝。極天罔墜。雖在波頹之中。尙有一二明經之士。深知其害。竊議而私嘆之。往往辨之於人。則或有所聽信而開悟之者。是理義之心。人皆有之矣。然下焉不尊。民卒不從。及與爲佛者辨之。則彼亦有是心。自知其非。屢至辭窮。然恥爲之屈。惟務自勝。援引公卿之尊奉。大儒之讚誦。以折辨者。乃曰夫豈不義而某公信之。以某公之位之德。而尊奉讚誦如此。汝反非之。汝能賢於某公歟。辨者若曰。位爲公卿。而於道有不學。號爲大儒。而於學有不正。但當質諸本心。辨其邪正而已。豈以某公之故。而遽以此爲是云耳。則爲有說矣。然此不惟獲以下訕上之罪。人反不信。以爲狂妄。    譏笑毁謗。使無所容。辨者默然無言。彼爲佛者。意氣洋洋。自以爲吾說勝也。是知異端之邪。不可以口舌爭也。下民之惑。不可以義理曉也。惟其學術之正。德位之達。爲人所信服者。然後可以正矣。吾友達可其人也。達可雖無其位。達可之學。學者素服其正也。達可之德。學者素服其達也。以予昏庸。不恤譏議。慨然有志於闢異端者。亦以達可爲之依歸也。天生達可。其斯道之福歟。近聞往來之言。達可看楞嚴。似佞佛者也。予曰。不看楞嚴。曷知其說之邪。達可看楞嚴。欲得其病而藥之。非好其道而欲精之也。旣而私自語曰。吾保達可必不佞佛。然昌黎一與太顚言。後世遂以爲口實。達可爲人所信服。其所爲繫於斯道之廢興。不可不自重也。且下民昏愚。易惑難曉。達可幸思之。

 상달가서(上達可書): 달가에게 올리는 글(정도전)

 異端은 날로 성하고 우리의 도는 점차 쇠잔하여지니, 백성을 禽獸의 지역에 몰아넣고 塗炭 속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사해의 인심이 거침없이 무질서로 흘러가서 올바른 紀綱이 서 있지 않으니 아, 통탄할 일입니다. 이 일을 누가 바로 잡는단 말입니까. 반드시 學術이 바르게 닦이고 道德에 깊이 통하여서 백성들이 믿고 복종할 만한 사람이어야 이를 바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모든 庶民들은 무식하고 어리석기만 하여서 스스로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장차 진실로 통달한 사람이 나타나서 이단을 물리치면 백성이 이단을 버리고, 그가 이단을 提唱하면 백성이 그 말에 和答하는 것인데, 이는 대개 일반 백성이 통달한 사람의 행동은 믿고 복종해야 한다는 것만 알뿐이요, 道에는 그릇됨과 올바름이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孟子께서 비록 궁하여 평민의 자리에 계셨으나 마침내 楊朱와 墨翟을 물리치시고 孔氏를 높이니 천하가 모두 그의 말을 따랐습니다. 이것은 대개 그 도덕이 깊이 통달되었고 그 덕이 천하 백성들로 하여금 믿고 복종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蕭衍은 비록 昏迷하여 아는 것이 없었으나 마침내 불교를 일으켜 천하가 따르게 되었으니, 이는 그 地位가 통달함으로써 천하가 복종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자의 말씀에 “군자(君子 임금을 말함)의 덕은 바람[風]이요, 小人 (백성)의 덕은 풀인데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쓰러진다.” 고 하신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이로부터 내려오면서 위에는 어진 인군이 없고, 아래에는 참된 선비가 없으므로 세상에는 가르침이 쇠퇴하여 사특한 言說이 방자히 퍼지고 있는데, 도덕이 현달한 위에 있는 사람마저 이 풍조를 좇아서 提唱하고 있으니 아, 그 弊端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宋 나라가 융성한 것은 참된 선비가 번갈아 일어나서 남겨 준 遺經을 바탕으로 하여 끊어진 道統을 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도를 붙들어 이단을 물리쳤으므로 학자가 바람에 쏠리듯이 따르게 되었으니, 이것은 역시 도덕을 통달한 것을 보고 사람들이 믿고 따른 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깝게도 도덕은 있으나 지위가 없어서 능히 도를 세상에 크게 펴서 이단의 邪慝한 언설의 뿌리를 뽑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學士는 오히려 그 학설에 힘입어서 이 도를 붙들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으니, 비록 이단의 弊害가 깊이 박혀 능히 급작스럽게 단절시키지는 못하였더라도 오히려 이 도가 다시 振興될 것을 바랄 수는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東方은 그 폐해가 더욱 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단을 敦篤히 믿고, 謹嚴하게 받들었으며 또 大儒라 부르는 선비들까지도 이를 讚誦하고 노래를 지어 읊었으니, 그 名聲과 威勢가 자못 소란하게 떨쳤던 것입니다. 저 아래의 혼미한 백성들은 오직 위에 있는 통달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쫓을 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先王의 학문은 고요해서 들을 수가 없었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은 이단뿐이었습니다. 襁褓 속에 싸인 어린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에는 먼저 이단의 말을 외웠으며, 기뻐하여 재롱할 때에도 문득 그 몸짓을 배워 습관이 성품으로 이루어져서 편안이 여기고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간사한 마음이 몸에 배여 굳어져서 그 뿌리를 뽑아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비록 총명한 선비라도 그 空玄한 말에 眩惑되었으며 亂暴한 사람은 禍福을 기뻐하고 두려워해서 높이 받들고 귀의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윤리기강을 허물고 人性을 소멸시켰으므로 풍속이 쇠퇴하여 몹시 문란해졌습니다. 사람마다 가세를 기울게 하고 재산을 파탄에 빠지게 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살지 못하고 떨어져 흩어지고 있으니, 실로 인간이 금수와 같이 되어 도탄 속에 빠져 그 허덕임이 또한 끝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하늘에서 받은 성품은 하늘이 끝나도록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비록 어지러운 世波 속일지라도 經論을 밝히는 선비가 한두 분쯤 나와서 이단의 폐해를 깊이 깨닫고 열심히 論究하며, 이 사실들을 통탄히 여겨 가끔 세상 사람에게 이단과 정도에 대해 변론해 주면, 혹 우리의 도를 믿어 깨우치는 자가 있게 되는데 이는 義理의 마음을 사람마다 다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위가 낮았으므로 백성이 마침내 잘 따르지 않았습니다. 佛敎를 하는 사람과 함께 시비를 논하여 보면, 그도 일찍이 본심이 있어 스스로 그릇됨을 알고 여러 번 그 말이 궁한 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굴함을 부끄럽게 여겨 변론을 하고 오직 이기려는 데에만 힘써 또 公卿들이 불을 높이 받들고 있는 현실과 大儒들이 讚誦한 말을 끌어다 대어 논변하는 자의 말을 꺾으면서 곧 말하기를, “어찌하여 의롭지 못한 일인데 某公께서 믿으시랴. 모공의 지위와 도덕으로도 받들고 칭송하는 것이 이와 같은데, 그대는 도리어 불도를 그르게 여기니 그대는 능히 모공보다 낫단 말이냐.”고 합니다. 이단을 변명하는 사람이 대답하기를, “지위에 있어서는 공경이 되었으나 도에 있어서는 배우지 못함이 있고, 남들은 대유라고 부르나 학문에는 바르지 못함이 있다. 다만 마땅히 本心으로 판단하여 사특하고 정직함을 분변할 따름이지 어찌 모공이 그렇게 한다고 하여 갑자기 이를 옳다고 한단 말인가.”라고 말할 수 있으나 이 말은 오직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비방한 죄를 얻게 될 뿐 아니라, 사람들이 도리어 믿지 않고 미친 소릴 한다 하면서 비웃고 헐뜯어 그로 하여금 용납될 곳이 없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론하던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잠자코 있으면 佛學을 하는 사람은 의기가 洋洋하여 내 말이 이겼다고 떠들어 댑니다.

 이러함으로 이단의 邪惡은가히 입으로서는 다투지 못할 것이 되어버리고 또 아랫 백성의 疑惑은 가히 義理만으로서는 깨우치지 못할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직 그 학술이 바르고 도덕적인 수양이 깊어서 다른 사람들이 믿고 복종할 만한 사람이어야 충분히 남을 바르게 할 수 있겠다고 보겠습니다.

 나의 벗 達可는 정말로 그런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달가는 비록 地位는 없으나, 달가의 학술에 대하여 말한다면,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달가의 올바른 학술에 복종해 왔고, 그의 도덕에 대하여 말한다면 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달가의 통달한 德性에 복종해 왔습니다.

 나와 같이 어둡고 庸劣한 사람으로서 세상 사람의 비웃음을 돌보지 않고서 慷慨히 이단을 물리치는 데 뜻을 둔 것도 달가에게 그 뜻을 의지하여 돌아감을 삼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달가를 내심은 우리의 도에 福인가 합니다.

 그런데 요즘 오고 가는 말을 들으니 달가가 《楞嚴經》을 보는 것이 또 불교에 眩惑된 자와 같다고 합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달가가 《楞嚴經》을 보지 아니하면 어찌 그 말의 사특함을 알겠는가? 달가가 〈《楞嚴經》을 보는 것은 그 속의 病痛을 찾아서 치료하고자 함이지 그 도를 좋아하여 정밀히 하려 함은 아니다.” 하고, 또 나 혼자 말하기를, “나는 달가가 반드시 부처에 迷惑하지 않음을 보증한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韓昌黎가 한 번 太顚과 더불어 말한 것을 가지고 뒷세상에서는 곧 구실을 삼아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달가는 다른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바가 되었습니다. 실로 달가의 하는 바에 따라 지금 우리 도의 興廢가 달려 있으니, 自重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 지금 우리 백성들은 그 마음이 몹시 昏迷하여서 의혹되기 쉽고, 曉諭하기 어려우니 달가를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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