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차과는

한 가지에 세 여름이니,

나되 모로매 한 고고리니


악차과는 과일의 이름이다. 이 나무는 한 가지에 열매 세 개가 나란히 맺는다고 한다. '한 고고리'는 동과(同科)를 새긴 말이다. 과(科)를 고고리라고 새긴다. 사전은 이 말을 '꼭지'라고 풀이한다. 사과 꼭지, 냄비 꼭지, 예를 들어 주지만 꼭지란 말만 가지고는 과(科)라는 글자나 고고리의 느낌을 전하기 어렵다. 같은 사전에 '이삭의 방언'이라는 풀이도 있다. 제주도 사투리란다. '이삭이 패다'란 말이 있다. 벼나 보리의 줄기로부터 이삭이 갈라져 나오는 모습을 그린다.

한 가지에 세 여름이니, 

나되 모로매 한 고고리니


혹(惑)과 업(業)과 고(苦)의 셋이 나되, 

모로매 한데 모돔을 가잘비시니라.


한 꼭지에 세 여름, 이럴 수는 없다. 꼭지 하나에는 하나의 여름만이 달린다. 고고리는 이삭이다. 이래야 말이 된다. 줄기 하나로부터 이삭이 패는 자리, 그 자리가 고고리이다. 여름이 달리는 자리는 꼭지이다. 이에 비해 꼭지의 아래, 꼭지가 갈려 나는 자리가 고고리이다. 하나의 고고리에서 꼭지들이 갈려 나는 모습, 이것이 악차과의 고고리를 가잘비는 까닭이다. 한 고고리에 세 여름, 언해불전은 하나의 마음으로부터 세가지 다른 결과가 갈려 나는 모습을 이렇게 비유한다.

곡식이 과(科)ㅣ 있어, 포기를 담듯하며

물이 마루가 있어, 갈래를 모도듯 하니라


과(科)라는 글자, 언해불전에서는 '굳'이라고 새기기도 한다. '구덩이'의 옛말이라고 한다. 곡식은 쌀이나 보리처럼 짚을 좇아 나온 곡식을 가리킨다. 짚과 굳과 포기, 옛말로는 '딮'과 '굳'과 '퍼기'이다. 언해불전에서 과(科)라는 글자를 풀이하기 위해 쓰는 말이다. 이게 좀 헷갈린다. 옛말투와 지금의 말투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고고리와 이삭은 언해불전의 말투를 따라가는 실마리가 된다. '딮'에서 이삭이 팬다. 패 나오는 이삭은 '퍼기'이다. 패 나오는 자리가 고고리다. 움푹 파인 그 자리가 '굳'이다. 곡식에는 고고리가 있다. 고고리에서 이삭이 갈린다. 이에 비해 물에는 마루가 있다. 산에서 내려 흐르는 물, 땅의 높낮이를 따라 갈래가 나뉜다. 마루는 종(宗), 가장 높은 꼭대기 봉우리이다. 물의 갈래를 따라 올라가면 마루를 만난다. 물의 갈래가 시작하는 자리이다. 포기가 갈리는 고고리와, 물이 갈리는 마루, 갈리는 자리는 닮았지만, 이를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다.

브즐우즐하여 명상(名相)에 다니며, 

지말(枝末)에 다니면 

큰 도(道)의 오아롬을 알지 못하릴새


언해불전의 말투, 사랑은 사유(思惟)이다. 말로 하는 사랑에 근본(根本)이 있다. 근(根)은 '뿌리'이고, 본(本)은 '밑'이다. 지말(枝末)은 근본(根本)의 짝이다. 지(枝)는 '가지'이고, 말(末)은 '끝'이다. 뿌리는 가지에 대응한다. 밑은 끝에 대응한다. 말로 하는 사랑, 명상(名相)은 사랑의 재료이다. 명상에도 뿌리와 가지가 있다. 밑과 끝이 있다. 사랑은 때로 뿌리와 밑을 향한다. 때로는 가지와 끝을 향한다. 뿌리와 가지가 맞아야 한다. 밑과 끝이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 논리, 또는 합리, 말의 이치가 맞는다. 말과 사랑의 '오아롬'이다. 밑과 끝이 온전해진다. 고고리를 따지는 일은 뿌리로부터 가지를 향하는 일이다. 말과 사랑이 갈려 나가는 길을 살핀다. 마루를 따지는 일은 가지로부터 뿌리를 향하는 일이다. 갈래로부터 뿌리로 돌아가는 길을 살핀다.

과(科)라는 글자, 고고리란 말은 사랑의 기술을 다룬다. 분류의 기술이고 분석의 기술이다. 요즘에는 이런 일을 '논리'라고 부른다. 이분법은 두 가지로 나누는 방법이다. 삼분법도 있고 오분법도 있다. 한가지를 몇가지로 가려 나누기도 하고, 나눈 것을 다시 녹여 합하여 모도기도 한다. 하나의 고고리에서 꼭지가 갈리는 일은 분석의 기술이다. 세 꼭지로부터 하나의 고고리로 돌아가는 일은 융합의 기술이다. 가려 나누는 일은 '펴다'라고 부른다. 녹여 모도는 일은 '접다'라고 부른다. 사랑, 또는 말과 글. 접고 펴는 일이다.

하나를 들면 곧 셋을 갖추니, 

셋을 이르나 체(體)는 곧 하나이다.


삼재(三才)라는 말이 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의 셋이다. 셋으로 나누는 방법이다. 불교에서는 삼신(三身), '세 몸'을 이야기 한다. 하나를 들면 셋을 갖춘다고 한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도 있다. 뜻은 몰라도 방법은 닮았다. '하나를 들면 셋을 갖추고', 이것은 가리고 나누는 일이고 펴는 일이다. '셋을 이르나 곧 하나', 이 것은 녹이고 모도는 일이고 접는 일이다. 접고 펴는 자리, 그 자리가 고고리이다. 이것이 고고리라는 말의 쓰임새이다. 고고리란 말은 이런 일을 돕는다.

'속장경'이란 말이 있다. 대장경에 이어 '속편으로 만든 대장경'이란 뜻이겠다. 말이야 어떻든 속장경의 역사를 시작한 분은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이다. 의천은 교장(敎藏)이라는 말을 썼다. 대장경에 포함된 책을 주석하고 해설한 책들을 따로 수집하여 집성하였다. 위의 그림은 의천이 집성한 고려교장에 포함된 책이다. 그림의 맨 오른쪽 아래에 과문(科文)이란 말이 들어 있다. 그림을 보면 한문이 보인다. 글자 아래로 이(二)나 삼(三)이라는 숫자가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로 선이 이어진다. 한문으로 된 부분은 과목(科目)이라고 부른다. 요즘 말에 견주자면, '소제목'이나 '표제어' 따위에 해당한다. 선을 따라가면 둘이나 셋으로 갈린 과목을 만난다. 과목 아래에는 다시 숫자가 있고 선이 이어진다. 과목과 선으로 이어지는 그림, 이런 책을 '과문'이라고 부른다. 줄여서 그냥 '과(科)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림으로 그렸기 때문에 과도(科圖)라고도 부른다. 글의 골격이고 구조이다. 책의 내용을 분석한 구조의 지도이다. 이 지도는 '한 고고리, 세 여름'의 형식을 따른다. 책의 이야기도 하나의 고고리로부터 갈려 나온다. 갈려 나오는 이야기의 틀, 과목을 따라 갈리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 

의구(意句)가 섞여 달려 천만 얼굴이로다

의구는 힐란할 제의, 가진 뜻과 묻는 언구(言句)이라


의천은 교장을 집성하고 출간하기 위하여 먼저 목록을 만들었다. 의천이 만든 목록에는 천여 종류의 책이 담겨 있다. 이 가운데 위와 같은 과문의 형식을 가진 책, 160종이 포함되어 있다. 전체 목록의 15%에 달한다. 대장경이건 속장경이건 모두가 불교 책이다. 불교 책을 읽으려면 먼저 과(科)라는 글자의 뜻, 이 글자에 담긴 형식과 방법을 알아야 했다. 사랑의 방법이고 글을 읽고 쓰는 방법이다. 과(科)의 방법은 말을 다루는 방법이기도 하다. 천만 얼굴의 뜻과 언구를 가리고 모도는 방법이다. 의천의 목록, 의천의 속장경을 위대하다고 칭찬하는 까닭이 있다. 저 안에 담긴 책의 이름, 천만의 의구, 의천이 아니었다면 사람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科)의 방법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의천 덕택에 저런 그림도 살아 남았다. 과(科)의 방법은 오래 된 학문의 방법이다. 말과 사유의 기술, 논리의 기술이다. 천만의 얼굴을 놀리는 기술, 놀라울 정도로 친절한 기술이다. 불교의 방법이지만, 방법의 쓸모로 치자면, 언제 어디서나 써먹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한 고고리, 세 여름', 이 말은 과(科)의 방법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 말만 잘 써먹어도 천만 얼굴이 쉬워진다.

언해불전의 편집 또한 과(科)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왼쪽의 그림은 언해불전 안에 편집된 과도의 부분이다. 고고리에서 꼭지들이 갈린다. 언해불전 전체가 이런 구조로 분석되어 있다. 이런 구조를 따라 편집했다. 요즘에는 마인드맵이란 말이 있다. 오른쪽 그림은 왼편의 과도에 맞추어 글의 편집을 마인드맵으로 다시 그려 본 것이다.

과도는 그림이다. 책을 눈으로 읽는 방식이다. 지도의 비유가 딱 어울린다. 책을 하나의 그림으로 통째로 그렸다. 책을 눈으로 바로 '본다'. 책을 읽는 일, 말을 따라, 논리를 따라 차례대로 읽는 방법도 있다. 말의 지도, 논리의 지도, 한 눈으로 한 번에 볼 수도 있다. 눈에 어린 그림, 책의 그림이 머리 속에 통째로 새겨지기도 한다. '한 고고리에 세 여름', 이건 무슨 마법이 아니다. 나는 손안에 든 지도 앱, '줌인-줌아웃'을 연상한다. 그림의 크기를 쥐고 펴는 기술이다. 활짝 펴면 엄청 큰 지도가 된다. 동서남북이 번득하다. 내가 사는 동네, 어디쯤인지 담박에 본다. 지도를 접어 가면 내가 사는 동네, 언덕이나 실개울도 보인다. 약국도 보이고 구멍가게도 보인다. 과도의 쓰임새가 똑 이렇다. 말의 흐름, 뜻의 흐름을 한눈으로 담박에 보는 일이다. 눈이 있으면 볼 수 있다. 볼 수 있으면 알 수 있다. 보면 그냥 안다. 어디 눈 뿐이랴, 들으면 바로 알고 냄새 맡으면 그냥 안다. 말과 뜻을 펴고 접고, 가리고 모도는 것도 마찬가지다. 과문의 기술이라지만, 익숙해지면 기술이랄 것도 없다. 보면 그냥 안다. 언해불전에 편집된 과도, 볼 수 있다면 엄청난 선물이 된다. 한번 보면 평생을 쓴다.

언해불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기술을 바탕으로 씌어지고 편집되었다. 나는 그래서 언해불전을 '논리, 또는 논술의 교재'라고 부른다. '한 고고리에 세 여름', 이제는 아주 잊혀졌지만, 우리말로 하는 논리와 논술이다. 그래서 언해불전의 그림, 참 '친절하고 아름답다'고 부른다.

요즘에도 글을 쓰면 차례나 목차를 달게 마련이다. 불교에서는 오래 전부터 과(科)라는 글자를 썼다. 과목이나 과문, 또는 과도, 언해불전은 이런 일을 '뜻을 올올이 차리다'라고 부른다. 말이나 글을 올올이 차리려면, 무엇보다 먼저 고고리를 챙겨야 한다. 고고리가 번득해야 뜻도 번득해진다. '글의 고고리', 또는 '이야기의 고고리', 글이나 이야기의 논리, 글을 걷고 펴는 요령이다. 차례일 수도 있고, 사이트맵일수도 있다. 듣거나 읽는 방법, 고고리의 줄거리를 따라 가는 방법도 있다. 고고리에 붙는 일이다.

월인천강 ㅡ 평등과 자유의 열쇠 _ 이야기의 고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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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ruk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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