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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藏)/잡장

천하를 천하에 담는다

대장경 천년의 지혜를 담은 그릇

 

배를 골짜기에 감추고, 그물을 못 속에 감추고는 안전하다고 한다. 그러나 한밤중에 힘이 있는 자가 지고 달아나더라도, 어두운 자는 알지 못한다. 크고 작은 것을 잘 감추어 두더라도 달아나는 것이 있다. 

 

그러나 만일 천하를 천하에 감추어 둔다면 달아날 수가 없다. 

이것이 영원한 존재의 큰 실상이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감춘다는 말도 장(藏)이다. 천하를 천하에 감춘다[장천하어천하(藏天下於天下)]고 한다. 이 말은 또 무슨 말일까? 무협지스럽기도 하고, 뭔가 신나는 얘기가 나올 것도 같다.

장자에게 세 가지 감춤[삼장(三藏)]이 있으니, 산을 못 안에 감추는 것이요, 배를 골짜기에 감추는 것이며, 천하를 천하 안에 감추는 것이다. 안전하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무상(無常)이 한밤중에 지고 달아나도 어두운 자는 깨닫지 못한다. 

 

세 가지 장(藏), 사람을 집안에 감추거나, 물건을 그릇에 감추는 것은 작은 감춤[소장(小藏)]이다. 배를 골짜기에 감추거나, 산을 못에 감추는 것은 큰 감춤[대장(大藏)]이다. 천하를 천하 안에 감추는 것은 장소가 없는 감춤[무소(無所藏)]이다. 

 

크고 작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 감출 수는 있다. 다만 생각 생각이 흘러서 새록새록 옮겨 바뀌니 이로써 변화하는 도리를 알겠다. 천하를 천하에 감춘다는 것이 어찌 감추는 것이겠는가? 장소가 없는 감춤이라 하겠다.

 

연수(延壽), 『종경록(宗鏡錄)』

 

장자의 장(藏)에 대한 『종경록(宗鏡錄)』의 해석이다. 이 책은 송나라 때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6) 스님이 지은 책이다. 100권이나 되는 큰 규모의 저작으로 수백 권에 달하는 대승의 경론들을 자유자재로 인용해 가며, 선종의 입장에서 선교일치의 사상을 풀어가고 있다.

장자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에 빗대어 선(禪)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는 뜻이다. 아무튼 연수는 장자의 장(藏)을 세 가지 장(藏), 삼장으로 해석한다. 앞의 장자의 글에서 ‘그물을 못 속에 감춘다’고 했을 때의 그물은 원문에는 산(山)이라는 글자로 되어 있다. ‘산을 못 속에 감춘다’는 말이 어색해서 그랬는지, 보통은 이 글자를 산(汕)으로 해석한다. 배를 으슥한 골짜기 안에 세워놓고, 그물은 물 속에 담가 놓는다는 발상이 더 합리적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어쨌든 연수는 그냥 산(山)으로 읽는다.

연수의 세 가지 장은 명사에 가깝다. ‘감춘다’라는 동사를 공간 위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감추려면 의당 감출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물건을 담아 감출 수 있는 그릇이나, 사람을 숨길 수 있는 방이나 집, 그런 공간들 말이다. 배를 감추는 골짜기도 공간이고, 산을 감추는 못도 공간이다. 그릇이나 방은 이를테면 작은 공간이고, 골짜기나 못은 큰 공간이다. 작은 공간에 감추는 것은 소장(小藏)이고, 큰 공간에 감추면 대장(大藏)이다. 소장(小藏)이건 대장(大藏)이건 그래서 연수의 장(藏)은 ‘그릇’에 가깝다. 이런 해석이 불교적인 장(藏)을 염두에 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래도 삼장이나 대장이라는 표현은 불교와의 관계를 연상시켜 주기는 한다.

연수는 ‘천하를 천하에 감추는 일’을 무소장(無所藏)이라고 불렀다. 장자의 원문을 의식하여 ‘장소가 없는 감춤’이라고 번역했지만, 공간 위주로 해석한다면 작은 그릇, 큰 그릇에 대응하여 크거나 작거나 ‘공간이 없는 그릇’이라고 번역을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말로만 따지자면 ‘감추지 않는다’거나, ‘감춤이 없는 감춤’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실제 명나라 때 덕청(德淸)이라는 분은 소장이나 대장을 유소장(有所藏)이라 해석한다. 이렇게 하면 세 가지 장이 아니라, 유소장-무소장이라는 두 가지로 설명이 된다. 이런 불교식의 해독은 부처님이 늘 하시던 말, ‘여래는 감추지 않는다. 무소장적(無所藏積)’을 연상시킨다. 감추지 않는 여래의 장(藏)은 이런 해독에 꼭 맞는다. 크거나 작거나 그릇은 그릇일 뿐이다. 담고 감춘다.

어쨌거나 무소장이라는 해석은 연수의 독특한 해석인 것만큼은 분명하고, 장(藏)을 공간적으로 해석했다는 것도 분명하다. 연수가 장자의 이 말을 인용하는 까닭은 무상(無常), 순간순간 생각생각으로 변하는 세상과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변화로부터 피하거나 숨을 공간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감추려고 하지 않고, 피하려고 하지 않는 일, ‘천하를 천하에 감추는 일’을 얘기하는 것이다.

잘 감춘다는 것은 하늘에 감추는 것이다. 태허라는 것은 하늘의 실상이다. 비었는데도 감추는 쓰임새가 있으니 그 감춤은 감춤이 없는 것[무장(無藏)]이다. 

 

물건을 숨기지 않는다면 사람들도 다투지 않는다. 크게는 천하로부터 작게는 한낱 물건이라도 힘으로 잡아당기면 망가지고 지혜로 덮는다면 잃어버린다. 

 

물건마다 물건대로 놓아 두어 자연에 감춘 뒤에 하늘의 처분을 기다려야 한다.

 

조식(曺植), 「한훤당의 그림 병풍에 다는 발문(한훤당화병발(寒暄堂畵屛跋)」

 

하늘에 감추고, 자연에 감추고, 물건은 물건대로 물건에 맡기고. 장자의 ‘감출 장(藏)’에 대한 조식의 견해이다. 이글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소장했던 그림 병풍에 부친 단상이다. 불행한 운명으로 가업이 탕진하여 토막 빗자루 하나 남지 않았다. 간신히 이 그림 하나가 도화서에 소장되었으니 내 물건이 아닌 무장(無藏)의 장(藏)이 되었다. 어느 해인가 그나마 민가로 흘러가 종적을 잃으니 이는 무장(無藏)의 공간으로 돌아간 셈이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가손(家孫)의 소장(所藏)으로 돌아왔고, 그가 와서 발문을 청하기에 마지못해 그 인연을 적는다고 했다.

감추지 않았기[무장(無藏)] 때문에 까닭에 감추게 되었고[유장(有藏)],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감추게 되었으니[선장(善藏)], 하늘에 감춘다면 물건은 숨을 수도 없고, 사람은 빼앗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인에게 바라건대, 집안에 소장하지 말고[가장(家藏)] 선생의 서원에 소장토록 한다면 이것이 잘 감추는 일이지 않겠는가. 만일 쇠로 봉하여 대대로 지킨다 해도 골짜기 안에 배를 감추는 격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상상은 자유라지만, 상상에도 흐름이 있고 품격이 있는 것 같다. 장천하어천하(藏天下於天下), 장자의 상상력은 영명연수의 무소장(無所藏)으로 변주되고, 조식의 무장(無藏)의 장(藏)으로 구체화된다. 조식은 자연에 맡기는 천장(天藏), 이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모델까지 제시한다. 집안에 모셔두지 말고 서원에 두라고 한다. 복잡할 것도 없다. 좋은 물건을 감추지 말고 함께 나누라는 말이다.

이른바 유불도(儒佛道) 삼교(三敎)의 거물들이다. 서 있는 자리가 다르고 생각의 바탕도 다르다. 그런데 장(藏)이라는 글자 하나를 매개로 이들은 비슷한 상상과 비슷한 얘기를 나눈다. 물론 직접 맞대면을 할 기회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얘기를 위해 자기 자리를 떠날 까닭도 없다. 장자는 장자대로, 연수는 연수대로, 남명은 남명대로 제 이야기를 한다. 

2008년 한일 공동 초조대장경 디지털화사업이 막바지에 달했을 무렵, 그때까지 촬영한 초조본 이미지들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여 인터넷 시험서비스를 시작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억지로 끌어오던 사업이어서 어설픈 구석도 많았지만, 보자고 만든 것, 빨리 보여 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 덜컥 공개를 결정했었다. 그런데 웬걸, 공개를 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서비스 속도가 한없이 느려지는 것이 아닌가? 사실 말이 공개이지, 초조대장경 이미지에 관심을 가져 줄 사람은 전 세계를 통틀어 얼마 되지 않는다. 아는 사람이나 찾아오는 한적한 사이트였다.

그런데 서비스가 시작되자 마자 일종의 해킹이랄까, 서버에 저장된 이미지들을 한 장씩 다운로드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몇 장을 보자는 게 아니라, 서버에 있는 이미지들을 기계적으로 몽땅 다운로드하자는 시도였다. 그러다 보니 속도가 느려지고 이미지 한 장 열어보는 데 몇 분씩이나 걸리는 상황이 되었다. IP를 차단하면 심천에서 홍콩으로 다시 사천으로, 주소를 바꾸고 장소를 바꿔 다시 시도를 하곤 했다. 어영부영 대장경 일에 끼어든 지도 이십 년인데, 이렇게 집요한 관심을 받아 본 것도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기쁜 마음도 생겼다. 초조 이미지들이 소중한 것이긴 한가 보다. 모처럼 보람도 느꼈다. 보자고 만든 것, 저토록 보고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니, 힘들게 꾸려온 일이 드디어 정당한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볼 수가 없지 않은가? 누군가 하염없이 사이트의 부하를 독점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넋을 놓고 돌아가는 화면만 기다려야 하니. 그런 시간이 이삼일 흘러갔다. 회원제로 로그인을 하도록 공개 방침을 바꾸고 어찌어찌 방어작전을 펴서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젠 막상 들어오는 손님들이 없었다. 주요 고객은 일을 해야 하는 연구소 식구들과 안팎의 연구진 그리고 일부 ‘극소수’의 전문가들뿐이었다.

고려대장경연구소는 2005년부터 이른바 ‘이미지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다. 여러 판본의 문헌 이미지들을 인터넷상에서 자유롭게 대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몇 년 사이에 수십만 장의 고해상도 이미지들이 서버에 쌓였다. 이미지 숫자만 해도 백만 장을 육박하다 보니 백업이 문제가 되었다. 이 방법 저 방법 궁리를 하고 대비를 해 봐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그저 남이 하는대로 여러 가지 방법을 병행하는 도리 외에는 완벽하게 안전한 방법이란 것은 없어 보였다.

장천하어천하(藏天下於天下)

천하를 천하에 담는다.

 

그냥 멋진 말이 아니다. 인터넷은 이미 우리의 천하이다. 인터넷에 그냥 열어 놓는 일이 가장 안전한 일이다. 어디선가 누구인가 보고 있으면 될 일이다. 필요한 사람이 가져다 어디엔가 저장하겠지. 천하에 담긴 물건은 절대로 사라지는 법이 없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조식이 서원에 두라고 조언했던 그 그림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자연으로 돌아갔을까? 누군가 아직도 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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